조선왕릉 기행 : 선릉과 정릉(1)
선릉과 정릉은 선정릉이라고도 하며, 서울 강남구 선릉로 100길 1에 있다. 2호선, 수인분당선 선릉 역 8, 9, 10번 출구로 나가면 선정릉에 갈 수 있다. 내가 생활하는 곳에 가까이 있는 선정릉에 대한 글을 시작으로, 조선왕릉에 대하여 글을 쓴다.
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과 정현왕후 윤 씨(1462-1530)의 능으로 서쪽에는 성종, 동쪽에는 정현왕후의 능이 있다. 능의 구조는 거의 같으나 성종의 능에만 병풍석이 있다.
정릉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 재위 1506-1544)의 능으로, 원래는 고양시 서삼릉 장경왕후의 희릉 서쪽 언덕에 조성하였으나, 문정왕후가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습니다.
선릉과 정릉은 1970년대 강남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도 잘 보전되어 도심에 푸른 녹지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왕릉입니다.
성종은 조선전기 제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69~1494년이며, 1469년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가 한명회 · 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해 형 월산군(月山君)의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성종을 왕위에 올렸다.
즉위할 당시 나이는 13세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그 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고, 1476년(성종 7)에 비로소 친정을 하였다.
친정 : 임금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것.
업적으로는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 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 교지 · 조례 ·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 오던『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조신(朝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했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鄕試)에서 사불양재(祀佛禳災) 해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 보내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연(經筵)을 통해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묘호(廟號)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종은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아들 19인과 딸 11인을 낳았다. 제10대 왕 연산군은 폐비 윤 씨의 아들이며 제11대 중종이 된 진성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은 정현왕후 윤 씨의 아들이다. 시호는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고, 묘효는 성종(成宗)이다.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광주(廣州)에 있었는데, 광주가 강남구로 편입되면서, 현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 씨의 능과 함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종 [成宗]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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